최신설교

제목 권세자의 칼
본문 로마서 12:1~12:4
설교자 이근호 설교일 2014-03-16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13: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13:3)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13:4)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자기 구원을 챙기는 의도를 성경을 대하고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즉 “내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잘 보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막상 인간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심판대 앞에서 개인적인 성과는 의도는 완전히 부질없는 헛수고였음이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5:27-29에 보면,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흔히 말하는 개별자를 내세우시지 않고 ‘인자(人子)’라고 불리는 그 분을 내세우십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인간들의 각 개인은 결국에는 이 보편자의 결정권 작용에 의해서 운명이 갈리게 됩니다. 이러한 일방적 조치를 ‘권세’, 곧 ‘힘’의 조치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이 어찌하지 못하는 힘, 그래서 나 중심의 현실관은 사실 헛된 망상임이 다 드러나는 그런 세계가 현실입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자신은 자신이 주도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성질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절대자로 인식하는 그 구멍에서 나옵니다. 한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려서 병원에 왔습니다. 그 사람은 평소에 그 누구의 명도 거부하는 자존심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의사는 그 사람과의 자존심 대결하기 위해 그 사람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환자 속에 있는 병을 본 것입니다. 의사는 병마와 싸우지 그 사람하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명령을 합니다. 하지만 환자는 평소대로 그 의사의 지시를 거부합니다. 건방지게 누구보고 명령하느냐고 화를 냅니다. 의사는 칼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취 주사를 놓고 환자의 배를 마구 가릅니다. 이 경우에 도대체 누가 이 의사에게 타인의 신체를 칼을 댈 권한과 자격을 누가 준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개별자를 이기는 보편자의 위력입니다. 의사가 알고 있는 의료시술 앞에서 모든 환자는 그 의학의 보편성에 저촉을 받습니다. 이렇게 되면 비록 그 환자가 사회적으로 대단한 존재이지만 의사 앞에서는 그렇게 그런 물체 덩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 권세는 이러한 물질에서 지배적인 정신을 구축하게 됩니다.

그 방식은 권세자를 인원화시키고 그 정점에 있는 자의 신체를 일반인의 신체와 달리 해석토록 하는 겁니다. 국왕에게는 두 개의 신체가 있다 입니다. 대역죄는 왕의 자연적 신체가 아니라 정치적 신체를 침범한 행위입니다. 따라서 그 형벌은 죄인의 자연적 신체가 아니라 정치적 신체 훼손을 처벌 근거로 삼게 됩니다.

왕의 자존심을 훼손한 죄수는 가혹한 처벌을 받습니다. 약한 보통인의 평범한 신체를 통해서 어떻게 하든 왕의 신체가 범상하지 않음을 부정적 방식이 처벌을 통해서도 보여주려고 합니다. 왕의 정치적 신체에 상응해서 그 신체의 우월함을 보이는 식으로 처별이 진행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왕의 ‘정치적 신체’의 불가침성을 봉축한다는 의미에서 ‘마이너스 대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장엄한 의례와 주장은 처벌을 받는 죄인에게 ‘마이너스 권력 기호를 각인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정치적 영역의 가장 어두운 부분에 죄인과 국왕과 대칭적인, 다만 역전된 모습으로 드러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신체형은 수형자의 끝나지 않는 고통과 절규 속에서 왕의 정치적 신체가 신성불가침이며 국왕은 영원불멸하다는 확신을 왕과 신민이 기쁨과 더불어 누리기 위한 의례입니다. 춘향전에서 춘향이에 대한 심한 취조는 변사또의 생일잔치의 의미를 반대로 드 높여주는 의미가 있다고 벌리는 의도적 이벤트입니다.

이처럼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골격을 이루는 정신적 신체는 기호나 상징이 혈액을 대신하여 돌고 있는 신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적 횡포는 인간들의 원초적 욕망과 마찰을 일으키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신체는 원래부터 정죄되고 처벌되어야 마땅한 신체라는 사실을, 일방적으로 억누르기만하는 권세를 통해서 펼치게 됩니다.

국가의 권세자가 비록 하나님이 주신 권세이지만 결코 그 나라가 천국은 아니요 그 나라의 직원들이 천국의 직원은 아닙니다. 거기에 비로 인간이 사모하는 이상 세계는 자신의 개별적 욕망을 극도로 인정해주고 만족시켜주는 나라입니다. 즉 개인은 자신이 가치가 허물어지지 않고 유지되면서도 자신의 모든 욕망에 있어 결핍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디있습니까? 이 질문의 답변을 위해 우리는 개인들이 구원욕구가 올바른 성경보기에 방해된다고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국가를 만들어서 집단적으로 구원하십니다. 천국에는 결코 개인적인 기대감이 들어설 수 없는 곳입니다. 사적인 것은 모두 버리는 그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을 마땅히 죽여주시는 그 능력이 곧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을 때, 그들은 아무 것도 한게 없습니다. 분리 판정은 이스라엘 본인들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렸음을 근거로 죽음의 사자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셔서 적들로부터 물리쳐 주셨습니다. 전쟁에서 진쪽은 발생되었는데 이긴 쪽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만히 있었을 뿐입니다.

승리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때문입니다. 이 분이 이스라엘의 대표작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구원이라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통하지도 않고 오로지 대표자하고만 하나님이 상대하십니다. 이 대표자가 머물고 활동하시는 장(場)이 곧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의도적으로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시는 나무를 심어 놓으셨습니다. .

그리고 뱀까지 집어넣어 인간으로 하여금 그 과실을 따먹게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죽음’을 보이고 그 죽으셨던 분을 주님이라고 부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들의 개별적 죽음은, 곧 죄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그리고 구원과 영생나무의 영생은 그곳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보이기 위함입니다.

세상 권세란 곧 선악적 질서체의 퍼짐이며 이속에서는 인간은 죄로인한 두려움을 당해야 하고 그리고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죽음 안에서 함께 있음으로서 성사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개인적인 구원은 없고 오직 예수님의 구원에 합류되어야 천국감을 우리가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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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1-4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보통 구원이라 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으로 하나님과 상대해서 천국 간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개인이 어디를 간다고요? 천국, 나라에 가지요. 개인은 개인인데 나라는 집단이거든요. 개인에서 집단에 가려면 그 개인의 개인임을 주장하는 모든 조건을 파괴해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개인은 개인만을 위해요. 나 좋은 쪽으로만 모든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에, 자기 좋은 쪽으로 세상이 돌아가도록 해석하기 때문에 집단에 어울리지를 않아요. 천국 가서 자기 부동산 주장하면 곤란한 겁니다.



이 땅에서는 부동산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내 개인을 위해서 허용된 시간이기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제가 늘 신기하게 여기는 것이 있어요. 산자나 죽은 자나 다 무덤에 가게 되면 그동안 우리가 믿었다고 여기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전도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할 수도 없고 전도 되나 안 되나 결국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호출되어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앞에 나오라고 우리가 전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마지막 상황, 누구든지 예수 앞에 섭니다, 하는 상황을 미리 당겨서 전도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용서를 받은 자와 예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한 자가 구분된다면 그 마지막 때의 심판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 입에 담아서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도 눈에 띠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리 앞서서 알고 있는 정보를 그들에게 소개하는 겁니다. 네가 어떻게 살든 간에 그것은 개별적으로 사는 것이고 결국은 인간이라 하는 것은 개별적으로 사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집단적으로 다루어질 그 때가 온다고 이야기를 해 줘야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자존심이 강한 환자가 있는데 딴에는 잘 나가는 사람이고 딴에는 으스대는 사람인데 위암에 걸려서 병원에 갔어요. 의사가 “잠시 진단을 해야 되니 옷고름을 푸시겠습니까?” 그 사람이 말하기를 “네가 뭔데?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 지시나 명령을 들은 적이 없어. 나는 나 나름대로 살아온 사람인데 네가 뭔데? 요새는 젊은 것들이 예의도 없어. 젊은 것들이 나이 많은 사람보고 옷고름을 풀라고 하다니. 네가 뭐야?” 이렇게 하게 되면 그 의사선생님이 어떻게 하겠어요? “마취주사 놔.”



주사 놓기 전까지는 버둥거리면서 “네가 뭔데 나한테 날카로운 주사기를 꼽아?” 이렇게 하다가도 마취주사 맞고 난 뒤에는 축 늘어져 버리지요. 그러면 강제로 수술하지요. 그 권세가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 의사가 그 회장님한테 어떤 감정이 있는 겁니까? 사적인 복수를 감행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보편성이라는 거예요. 의료술의 보편성이에요. 의사가 진단하고 진찰하는 모든 의학 앞에서는 재물이 있든 아니면 밑바닥에서 노는 노숙자든 개별자들이 갖고 있는 개별의 권한과 의미를 중지시킵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동일하게 적용시키지요. 동일한 기준, 표준화라고 하는데 동일한 표준화, 질서에 의해서 실시해버립니다. 분명히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천상천하유아독존, 자기밖에 몰라요. 그 이야기 맞습니다. 눈만 뜨면 밤에 잠을 잘 때도 내가 그 꿈의 주인공이에요. 드라마의 주인공이 납니다. 그런데 꿈을 꾸고 몸이 아플 때는 이 잘난 주인공도 의사 앞에 옷고름을 풀어야 되고 마취제를 맞아야 되고 이 귀한 장기를 적출해서 끄집어냄을 당해야 되는 그런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니들이 뭔데 내 몸에 손을 대?”라고 할 때 오늘 본문에서는 그걸 권세라고 이야기하고, 개별을 인정하지 않는 보편적인 질서라고 하고 그 질서는 인간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주위의 가까운 병원이나 학교나 특히 젊은 애들에게 짜증나는 군대……, “네가 뭔데 내 스케줄을 조종하는 거야? 난 아침 열시까지 자다가 온 사람이야. 네가 왜 ‘빠바바밤~’ 네가 뭔데 새벽 여섯시에 깨우는데? 기상나팔을 왜 부는데? 나는 그런 식으로 지난 20년 동안 안 살았어.” 해봐야 버티지를 못하지요.



장래 모든 인간이 죽고 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아침 아홉시까지 자야 되고, 하는 그것이 천국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세상의 재벌이기 때문에 누구의 허락 없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내 맘대로 움직일 거야, 하는 것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나는 동화사주지기에 내 스케줄 내가 조종하고 도 닦는 것도 내가 한다, 는 그것도 주지스님 돌아가면, 제가 중한테는 ‘님’자 안 붙이는데 붙입니다, 주지스님 돌아가면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보편적인 거예요. “개별적인 것은 네가 살아 있다고 여길 때만 즐겨라. 그 때 뿐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개인적인 욕망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취미와 오락을 믿는 것이 아니에요. 나도 내 맘대로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보편의 고마움, 그 영원한 질서의 고마움, 우리는 그게 성경을 통해서 미리 당겨서 덮쳐진 거예요. 덮쳐진 겁니다. 노래에 이런 게 있어요. “혼자서 울고불고.” 시스타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인데, “혼자서 영화보고 혼자서 책을 보고”, 젊은 사람들이 느끼는 세상이라 하는 것은 그저 내가 주인공이고 나뿐이에요. 어떤 권세도 인정하지 않고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다가 남자들은 군대 가서 또 다른 현실을 맛보고 여자들은 시집가서 시댁이라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이게 뭐야? 나는 이 남자와 결혼 한 거지 시집과 결혼한 것이 아닌데 왜 이렇게 된 거야?’ 그렇게 버티다가 자식새끼 하나 놓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시집에 시집살이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식 뒷바라지 한다고 평생을 허비하고 소비하는 것, 내 잘나갔던 그 똑똑한 두뇌도 자식 아침 도시락 챙겨주는데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인터넷 열어놓고 레시피를 찾아야 되는 평범한 주부로 전락해버리죠. 나이 20대의 그 화려한 그 모든 패션도 결혼하면 남편 학교 때 입던 츄리닝 입고 장이나 보러 가지요.





어떤 보편적인 것이 우리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개인으로 출발하는 현실과 보편적인 현실을 천국가기 전에 이 땅에서 미리 맛보게 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국가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성경은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고 했는데 왜 하나님나라 이야기하면서 국가 이야기를 중간에 끼워 넣는지 그 순서를, 그 의미를 우리가 알아야 돼요. 설교 다시 해 봅시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나 있는데 나 개인, 개별자가 여기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하나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엄청난 오해에요.



그렇게 되면 신약성경만 있으면 되고 구약성경은 가위로 잘라내도 괜찮은 것이 되거든요. 그런데 정말 구원에 대해서 언급했던 것이 구약이고 거기에 대표적인 사건이 나오는데 그게 출애굽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나라입니다. 지금 개인을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나라가 있었다. 어떤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어떤 민족이 있었다. 보세요. 어떤 나라도 집단이고 어떤 민족도 집단이지요. 개인은 날라 가고 눈에 띄지도 않아요. 거기에 어떤 나라가 구성되어서 나오는데 그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벌써 개인은 없지요. 그 나라에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동행하셨다. 보세요. 하나님은 나라와 동행하지 개인과 동행하지 않지요?



구약을 경유해서 하나님나라를 생각해야 돼요. 그렇게 구약 끝나고 세례요한이 외치기를 광야에서 엘리야 폼 잡고 가죽옷 입고 “우리는 진정 출애굽 한 적이 없었다. 광야에서 다시 대기! 여기 요단강 있어. 우리 요단강 건너 약속의 땅에 갔던 것을 이 시대에서 다시 되풀이하자.” 하고 요단강에서 회개하는 사람들 물속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끄집어내지요.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네가 이발사인지 제빵사인지 교사인지 배관공인지 농부인지 성직자인지 이 모든 개별적인 직업은 다 일소에 붙이고 그저 물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바다에서 다시 기어 나온 사람들, 개별적인 속성이 죽어 있고 보편적인 질서만 장악된 그 사람들.



보편적인 질서만으로 소속돼야 구원받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때 너 개인적인 선행이나 악행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너를 대신할 대표자를 보고 그 효과로서, 그 대표자와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체결의 효과 속에서, 그 힘 속에서, 권세 속에서, 능력 속에서 너를 천국으로 넣겠다는 진짜 하나님이 진짜 약속된 계획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와서 “집사님, 헌금 얼마 했어요?” “이 만원 했는데 다음에는 좀 더할까?” “집사님은 기도한 번 했다 하면 한 시간 반씩 하는데 나는 오 분 하면 지치던데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어요?” “집사님은 소프라노 하는데 음정 하나 안 틀리네. 나는 음정도 못 맞추겠어.”이런 것. “집사님은 전도를 다섯 명 했는데 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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