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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과의 관계
본문 로마서 14:7~14:9
설교자 이근호 설교일 2014-04-13

주님과의 관계

2014년 4월 13일                              

 

본문 말씀: 로마서 14:7-9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사람은 사나 죽으나 죽음을 모릅니다. 곧 사나 죽으나 사는 것도 모르고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은 단지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산 자’요 다른 하나는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이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름하는 기준은 인간 쪽에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제시된 기준입니다. 사람들이 내세운 기준이라면, 직업이나 인품이나 성실도나 인물 생김새나 가진 재산이나 소유력으로 기준을 나누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들의 기준으로서는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는 그런 ‘산 자’와 ‘죽은 자’의 분류에 실패합니다. 흔히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주’란 바로 이런 기준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고 말하려면 자신의 기준을 철폐하고 주님이 내리시는 기준에 동의합니다는 내용을 담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 ‘우리’로 출발합니다. 그런데 이 ‘우리’에 담긴 내용을 보게 되면 이러합니다. 즉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입니다. 이 우리 만이 천국에 가게 되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는 예수님의 기준에 준해서 발생된 우리이기에 평소에 인간들의 자기 기준을 적용해서는 나올 수 없는 우리입니다.

결국 우리는 오늘 교회와서 아무리 이 성경 구절을 들여다 보아도 이 구절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간직하고 있는 우리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나를 위해서 살고 죽을 때에도 나의 명예와 자존심을 유지한채 죽고 싶어하는 그 나 중심의 우리가 이미 설정되어 있기에 이 우리 속에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우리 개념을 담아 섞을 넣을 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많은 대중들이 나와서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촌에서 올라온 메시야라고 잔뜩 기대를 하면서 환호성을 질러대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정치당국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사형 판결이 내리고 난 뒤, 갈보리로 올라가는 그 연도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즉 그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이미 설정되어 있는 ‘우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겁니다. ‘끝까지 자기를 위해 살고 죽는 날까지 자기 이름을 높이기에 주력하면서 사는’ 그 ‘우리’에서 벗어날 위인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가 아니면 천국과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그 ‘우리’만 따로 모아 천국을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무가 모여서 숲이 되듯이 너와 내가 모이면 우리가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에서는 예수님의 일방적 경계 짓기에 의해서 거부당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는 성전에서 임시적 재판이 벌어집니다. 재판장은 예수님이시고 재판받는 사람은 바리새인과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말합니다. 자신은 저 세리와 같이 아니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했다는 겁니다. 토색이나 간음이나 불의도 행하지 아니했다 합니다. 그런데 세리는 말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판정을 내리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판결에서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이 일찍 개입됩니다.

죄인이라는 세리가 졸지에 의인이 되어 천국에 합격되고 말았습니다. 바리새인은 먼저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이 아니합니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그는 그의 말처럼 세리에 합류되지 못하는 다른 세계로 가게 됩니다. 그곳은 바로 지옥입니다. 세리는 자신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앞에 무의미한 것임을 고백한 겁니다.

이와 같은 예가 다윗에게서도 나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난 뒤에, 자신이 한 행위가 나쁜 짓이라는 식으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따라서 그 나쁜 짓을 가리기 위해 고의가 아닌 것처럼 꾸민 살인에 의해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 장군을 죽여버렸습니다. 밧세바을 임신케 한 유전자가 다윗 본인이 아니라 남편인 우리가 장군인 것으로 뒤집어 쒸우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그 감추어진 죄를 들추어내자 비로소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자신은 날 때부터 죄인이었노라고 말입니다. 즉 자신이 판정내리는 잘못과 아니 잘못 그 자체가 모두 무의미할 정도로 이미 자신이 출생 자체가 죄인으로 출생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다윗이나 세리나 모두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마땅히 죄인됨을 알게 된 겁니다. 이럴 경우에만 인간들이 내세운 ‘우리’에서 벗어나서 주님과 더불어 있는 ‘우리’에 속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자기 중심의 ‘우리’에서 빠져 있는 우리를 ‘예수님과 더불어 있는 우리’로 전환시켜 낼까요?

이 작업을 위해 구약 성경에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낯선 죽음’과 닿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때로 물, 때로는 불, 때로는 사자굴, 때로는 전쟁이 주는 죽음과 만나게 해줍니다. 이 낯선 죽음 앞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그 어떤 행위도 다 무용지물이며 소용없는 무의미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게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익히 아는 죽음을 예수님께 제공하면 예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죽음마저 거절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예상하는 죽음이란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 있음’에서 형성되는 그 우리와 상관없는 죽음이며 베드로가 자신이 살아있는 경우에서 감안한 죽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죽음이 찾아와야 하는데 그 참된 죽음은 이사야 53:7에 근거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도살장’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인간들이 내세운 ‘우리 세상’이요 ‘어린 양’은 예수님을 두로 말합니다.

즉 자칭 무의미하지 않고 의미있음을 주장하는 그 세상판에서 예수님께서 늘 소용없고,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존재로 취급받아서 살해당하는 그 ‘낯선 죽음’이 일어나는 사건이 지옥과 천국을 가름하는 경계선 역할입니다. 언약적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세상에서 도살당하는 시련을 당하므로서 예수님처럼 구원받게 하시는구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중요한 것을 하나 빠트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자신을 예수님을 죽이는 도살장의 일부로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육신이 있는 한, 예수님보다 예수 믿는 나 자신에게 더 최종적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나 죽으나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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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4장 7절에서 9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57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4:7-9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님을 ‘주’라고 부를 때는 그 주님 앞에 있는 인간을 인간으로 부르지 않고 이렇게 달리 표현합니다.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너는 산자야.” 혹은 “너는 죽은 자야.” 이 두 종류로만 분류해서 표현합니다. 너는 키가 몇 센티야, 너는 재산이 얼마야, 너는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살아, 너는 집사인지 목사인지, 그런 식으로 우리 존재에 붙어 있는 직분이나 직업가지고 우리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같은 인간끼리 이 지상에서 서로 평가하는 식으로, 내가 다른 사람들을 보거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에 평가하는 그 기준을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 쪽에서, 예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내세운 그 기준이 있어요.



그 기준에 의하면 인간은 달랑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살았나, 죽었나? “네가 산자에 속하느냐, 아니면 죽은 자에 속하느냐?” 서랍이 있다면 그 서랍에 딱 두 종류의 서랍밖에 없어요. 한쪽 서랍은 양말, 한쪽 서랍에는 양말, 이렇게 집어넣듯이 이쪽과 저쪽 서랍에 다 집어넣는 겁니다. 그렇게 다 분류시켜 놓고 그 분류시킨 작업을 하시는 그 분은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 부를 때 “예수님 당신만이 그런 분류를 우리에게 적용시킨 당사자입니다.”라는 말을 짧게 이야기하면 “주여.”



“모든 인간을 산자냐 죽은자냐, 죽은자냐 산자냐, 달랑 두 종류로만 나누는 기준을 제시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주여.”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를때는 그냥 앞에 뭐가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기준이 우리의 기준을 완전히 철회해 버리고 새로운 기준을 도입시켜서 우리를 보신다는 겁니다. 그런 작업을 지금도 하셔요.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재판받을 때, 진리가 무엇이냐, 기준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빌라도가 하는 말이 지금 당신은 피고고 나는 재판을 하고 있는데 우리의 기준이 당신에게 먹히지를 않는다는 거지요.



그러면 “나에게 잘 보이기만 하면 지금이라도 피고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으니까 나에게 잘 보이라.”고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네가 나설 필요가 없다. 지금이라도 하늘의 천사가 와서 나를 풀어줄 수 있는 문제다.” 했어요. 빌라도가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냐”고 할 때 예수님이 “당신 말대로 내가 유대인의 왕인데 유대인의 왕, 이스라엘 왕이라고 할 때 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가 하는 말이 “기준이 뭐냐, 진리가 뭐냐?” 할 때 예수님께서 답변을 안하고 침묵했습니다.



그 침묵도 예수님이 활동이에요. 세상이 너무 조용하다고 생각됩니까? 주께서는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하신다, 해서 지금도 일을 멈추지를 않습니다. “보라,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마태복음 28장 마지막 이야기가 그거예요. “보라, 세상 끝 날까지 너희에게 일을 시킬 것이다. 왜? 내가 일하니까.”



아버지가 일하니까 내가 일하고 내가 일하니까 너희도 일하게 되고. 때로는 세상 사람들 보기에 그것이 침묵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 침묵조차도 활동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 활동은 뭐냐, 바로 이 기준입니다. 세상을 두 종류로 나누는 거예요. “두껍아, 두껍아! 죽었니, 살았니?” 네가 죽은 자에 속하느냐 아니면 산자에 속하느냐. 지금 로마서 14장 17절을 보고 있습니다. 죽은 자와 산자를 나눠놓고 산자는 한꺼번에 묶어서 천국이라고 부르고 죽은 자를 한꺼번에 묶어서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분류해서 묶는 모든 기준은 인간 쪽에서 나오는 것은 전부 다 거절하십니다. 다 거부하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그 기준에 의해서 천국과 지옥이 분류가 돼요. 사실은 이 점을 예수님 오시기 전에 세례요한도 이미 언급을 했었습니다. 보라 하늘나라가 가깝다, 심판 날이 가깝다고 이야기했고……, 하늘나라라는 말은 심판 날을 의미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을 때는 반드시……, 학교에서 학기 끝날 때는 시험을 치잖아요. 시험을 치면 그 다음에 방학에 들어가잖아요. 시험을 치고 모든 것이 마무리 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 시험 치는 날이 가까이 왔으니, 기말시험이 가까이 왔으니, 라고 세례요한이 이야기하면서 하늘나라가 오게 되면 알곡은 곳간에 넣고 가라지는 모아서 유황불에 넣는다고 했습니다. 세례요한도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그런 기준을 제시했을 때 특별한 기준은 없었어요. 단지 회개하며 기다리기만 하자는 식이었어요. 물속에 들어가서 회개하고 오실 심판 주를 물속에 들어간 사람만이 보이기에 “나는 물속에 빠져죽어야 마땅합니다.” 하는 식으로 나는 이미 죽어도 합당하다는 자세를 가지고 오실 메시아를 받아들이면 비로소 그 사람은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는 관련성이 있는 사람에 속하는 겁니다. 산자가 될 수 있어요.



서울에 가서도 그런 강의를 했는데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성전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서 미리 앞당겨서 재판하는 과정이 있었어요. 거기 예수님 앞에 재판받는 사람이 둘 있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고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했습니다. 그런 반면에 세리는 말하기를 “내가 예수 믿습니다, 하늘나라 믿습니다, 천국을 믿습니다.”가 아니라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했어요. 어떤 존재를 인정합니다, 가 아니라 하나님이 설정한 기준 앞에서 “나는 죄인이 맞습니다. 그런 나라에 내가 들어갈 입장이 못 됨을 인정합니다. 그런 나라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 나라에 합류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라는 것을 인정을 했어요.



그런데 정작 재판하시는, 마지막 시험 치시는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로 의인이다.” 라고 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연구했습니다. 하늘나라를 연구했습니다. 천국을 탐색하고 보고 왔습니다.”가 아니라 정말 주님의 기준을 안다면 그 주님의 기준에 내가 어떤 노릇을 시도한다 할지라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내가 자인해야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그 동안 내가 살아온 것이 의미 없는 존재,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 겁니다. 세리가 그런 식으로 의인 되었는데 문제는 바리새인이에요. 바리새인이 십일조를 했다, 금식했다, 구제했다, 했는데 바리새인이 결정적으로 실수한 게 있습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했다.”고 했거든요.



다시 말해서 “나는 저 세리가 있는 장소와 영역에 나는 끼지 않습니다.” 한 거예요. 바로 그 사람은 그것 때문에 지옥 간 거예요. 주님께서 의인이라고 판정을 내린 그 세리의 모습과 나는 같지 않다고, 자기 말로 스스로 지옥 가는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바리새인이 나쁜 짓을 했다는 말이 아니에요. 바리새인이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이 흉악범이나 성 폭행 범이 아니고, 구원받는 저쪽 사람과 나는 다르다는 그 이야기가 곧 스스로 자신은 지옥 간다는 결과를 낳게 된 거예요.



주님이 제시한 천국의 기준이 이 땅에서 부합되는 사람은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이 땅에서 지옥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나는 저 죄인과 차원이 다르고 질이 다릅니다.”라고 자기존재의 의미를 둔 그 쪽, 이쪽이 아니니까, 천국 쪽이 아니니까 나머지 배제된 쪽이 다 자동적으로 지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 이것은 천국의 조건이라고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천국의 조건 속에서 우리라는, 영어로 We, 천국에 가도록 같이 모아놓은 이 우리가 어떤 우리인가 하면 7절과 8절에 보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7절과 8절을 제가 연달아 읽어드렸는데요, 제가 보기에 재미있는 것은 이거예요. 8절이 없다고 생각하고 7절만 읽어봅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라고 했을 때 그 뒤에 나오는 8절을 감춰놓고 우리가 모른다고 한다면 7절만 가지고서는 해답이 없고 대략난감해요.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면 나는 나 말고 또 누굴 위해서 사는 존재란 말인가, 해답이 없는 거예요. 7절 나오고 그 다음에 8절 나올 때 그리되면 그것이 부합된 사람은 천국에 가는데 8절 나오고 7절 나와 버리면 이것은 천국 갈 지 지옥 갈 지 분명치가 않아요.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8절이 먼저 나와 버리면 “여러분, 우리는 다 주를 위해 삽시다.” 흔히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우리가 다 주를 위해 삽시다. 아멘 하십니까?” “아멘.” 우리교회는 거의 아멘이 없지만 아멘, 하는 분은 오늘 출석을 안했는데, 홀로 아멘인데, 주를 위해 살자고 할 때 그렇게 합시다, 해서 주를 위해 산다고 헌금을 하든지 청소를 했다고 한다면 그것이 자기를 위해 하는지 주를 위해 하는지를 어떻게 압니까? 주를 위해서 하는데 사실은 주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 잘 보이면 ‘내가 살겠구나.’ 할 때 이것이 자기를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서 도입된 주를 위함이지요.



주님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사실은 은밀하게 내가 잘 되는 것, 내가 목적인데 은근히 주를 위해서 하는 것처럼 티를 내놓고 실제로는 결국 주를 위해서 잘 사니까 그것을 근거로 내가 사는 식의 꼼수를 한 번 써 봐, 이렇게 나올 수가 있어요. 8절부터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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