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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신도 사제가 보는 광주민중항쟁과 세월호 참사
본문 시편 31:1~31:2
사도행전 7:55~7:60
설교자 김명진,정영훈,이정임,박채훈 설교일 2014-05-23

“평신도 사제가 보는 광주민중항쟁과 세월호 참사”

시편 31:1-2,14-16; 사도 7:55-60; 벧전 2:4-5,9; 요한 14:15-21 

김명진 교우 / 정영훈 집사 / 이정임 집사 / 박채훈 교우

 

 

[김명진 교우]

 

안녕하십니까, 저는 성공회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있는 새날청년회 김명진입니다. 진도를 다녀와 보니 한국은 세월호와 같이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8시 50여분경, 한동안 구경하지 못했던 짙은 안개가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그때 즈음 인천에서 출발한 청해진해운의 세월호는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그날의 아침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대 재앙이 일어날지는 몰랐을 겁니다. 270여명이 ‘실종’ 이라는 속보를 보았을 때 저는 기겁했습니다. 초대형 해상 재난이 눈앞에 벌어진 것입니다. 바다 속에 270여명이 실종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진도실내체육관을 처음 들어간 그 순간, 평소라면 선선해야할 체육관이 뜨거운 습기로 저를 처음 맞이했습니다. 수많은 실종자 가족들이 그 넓은 체육관을 가득 매우고 있었습니다. 실내체육관은 그저 비바람을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일 뿐, 말 그대로 난민촌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실내체육관과 30분 떨어진 팽목항은, 마땅한 장소가 없어 임시 천막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항구로 시신이 들어올 때면 수십, 수 백 명이 되는 희생자 가족들이 모여들었고, 깊은 고요함이 팽목항을 짓눌렀습니다. 시신을 운구하는 119대원들이 걸을 때마다 나는 자갈바닥소리와 취재진의 셔터소리를 빼면,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옆 사람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뼈아픈 고요함이었습니다.

 

취재하는 내내, 로마서 12장 15절의 말씀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습니다. 기쁨을 함께, 슬픔을 함께. 진정한 국민에 의한 국가였다면, 슬픔을 함께하고 적극적인 대처를 해야 하는 것은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수많은 국가기관이 진도로 내려와 있었지만 그 모든 기관을 ‘조율하는’ 국가는 부재했습니다. ‘억압하는’ 국가만 있었을 뿐입니다. 하는 말은 해경 다르고 해수부 다르고 팽목항 다르고 체육관 달랐습니다. 서해지방해경청장 브리핑 듣고 있는데 그 와중에 속보가 뜹니다. 브리핑은 아직 못 들어갔다는데 속보는 진입이 성공했다 합니다.

 

현장에서 가장 답답해 보였던 것은 119였습니다. 119의 해상 구조범위가 ‘민물’ 까지인 규정 덕에, UN국제구조대 등급분류 최상위등급인 ‘헤비HEAVY’급을 보유하고 있는 소방방재청 중앙119구조본부는 해경의 뒷바라지만 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경찰은 뭐하고 있었습니까? 체육관 안에 등산복 입은 사복경찰 들여보내고, 기동대 배치하여 가족들 움직임 통제하고 있습니다.

 

진도 현장에서 국민의 방송 KBS는 국민의 방송이 아니었습니다. 국가재난주관방송사인 KBS는 현장최다인력인 120여명의 스텝을 진도로 파견했지만 그들은 취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보도 자료를 읽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아픈 자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 ‘취재’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언론은 오히려 JTBC를 비롯한 뉴스타파, 국민TV등의 언론이었습니다. 또한 피해자 가족 분들이 카메라 다 나가라고 소리쳐도 남아있을 수 있는 언론사는 외신이었습니다. 국내 언론에 대한 불신을 단번에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5.18당시에도 비슷한 상황은 연속이었습니다. 정부는 국민을 외면했습니다. 정말 국가가 광주광역시의 시민들을 생각했더라면, 그런 만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언론은 정부의 권력에 이기지 못하고 통제 당했습니다. 그 억압의 틈에서 광주의 현장을 타전한 언론사가 있었습니다. 외신이었던 CBS 브루스더닝 기자는 kwangju - south korea. 로 끝나는 현장 리포트로 광주의 모습을 정부의 통제 없이 타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세월호사건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언론을 통제하는 방법만 늘어났을 뿐입니다.

 

국민의 보호가 의무인 국가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사고 현장에 도착한 이들은, 또 세월호에 다가가 절반 넘는 생존자를 구조해 낸 이들은 유조선인 돌라에이스, 진도군 관공선 진도아리랑, 그리고 전라남도 어업지도선이었습니다. 해상구조의 최일선에 있어야했던 해양경찰은 뒤늦게 도착해 우왕좌왕하기만 했습니다. 누가 지금 그들의 이웃입니까?

 

[정영훈 집사]

 

제가 처음 우연찮게 평신도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짧아 원래의 원고를 대폭 줄였으니, 행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교사라서 설교도 잘 할 것으로 보실 수도 있지만, 40분 수업에 익숙하여 더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침에 오면서 제 설교문을 검토했는데, 제 풀에 눈물이 많이 나서 이 자리에서는 더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요즘 여기저기에 울타리 장미가 활짝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 장미에 얽힌 사연이 많고, 낭만적인 추억들도 있었지만, 올 해는 꽃 감상할 기분이 아니고, 그 장미꽃을 보며 갑자기 세월호에서 죽어간 아이들이 연상되었습니다. 꽃다운 나이의 아이들이 죽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렇게 아름답게 피어나지 않았을까, 아니, 이 선홍빛 장미꽃은 그 아이들이 흘린 피의 모습일지도 몰라, 혹은 그 한스럽게 스러져간 아이들의 영혼이 장미꽃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 5.18즈음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도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목포에도 빨간 장미꽃이 많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때 아름답게 피어난 장미가, 머잖아 검붉은 핏빛 장미로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저는 고 3이었습니다. 광주에서 학살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광주로 가는 길은 차단된 상태에서 시민들은 목포역 광장에 모여 목포 시내를 돌면서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씨 석방하라”를 목 터지게 외쳤습니다. 그때 목포에도 계엄군이 몰려 올 거라는 공포스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앞장서지는 못하고 시위대를 따라 다니면서 구호를 외치고, 길가의 붉은 장미꽃을 보며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를 쓰거나 발표되지도 못할 연설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저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아버지 집안, 그러니까 할아버지 중의 한 분이 한국전쟁 당시 경찰 하급 간부쯤 되셨는데, 인공치하가 되자 그 지역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그쪽으로 전향하여, 사람들을 많이 살게 하셨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로 인한 감옥살이와 연좌제적 피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집안의 전답을 다 팔아 바쳤는데도 실패했답니다. 아버지는 그 과정에서 배우지도 못하고 재산도 없이 착하게 사셨지만, 5학년때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어릴 때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양심이었고 희망이었으며, 교회에서 노래와 성경암송 등으로 인정을 받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까지 학교 끝나면 집에 와서 농사 일을 도와야 했고, 시험을 앞두고도 주말이나 주일, 휴일은 일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독서를 좋아해서 학교도서관의 책을 순서를 정해 놓고 읽으며 가능하면 늦게 집에 가곤 해서 엄마한테 혼도 많이 났습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인문계 쪽은 장학생제도가 별로 없었고, 금오공고 등 공업고 쪽으로는 3년 장학생으로 갈 수 있다 하니 학교나 집에서는 그쪽을 강권했습니다. 저는 저의 적성이 아니라서 공고는 못 간다고 했고, 그러면 고등학교 못 보낸다고 하여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마리아회 고등학교라고, 생긴지 3년된 인문계고등학교에서 각 중학교에서 전교 1, 2등 학생을 대상으로 3년 장학금과, 기숙사를 제공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스카웃하는 기회가 있어서 그 곳에 진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 2때 10.26이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 저는 지역이 목포였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만이 유일한 대통령이고, 그가 아니면 당장 북한에서 쳐들어와서 나라가 망할 줄 알았습니다. 제가 일류대학 진학의 사명을 띄고 장학생으로 갔지만, 저는 입시공부에만 매달리지는 못하는 학생이라 선생님께 혼도 났고, 별명이 소크라테스였을 만큼 사색을 하는 편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전혀 깨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례식이 끝난 뒤 신문 방송이 변했고, 선생님들 말씀이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너무나 몰랐던 사실들을 접하면서 배반감이 컸습니다. 기독교 정신이기도 한 진리 탐구-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구하라 얻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이렇게 정치적으로 잘 못 세뇌를 받아왔다는 사실에 분개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 민주주의와 정의가 꽃 피는 나라가 되기를 더욱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5.18 당시 학교는 2달간 휴교를 했습니다. 고3 때라 다른 10여명의 장학생들은 낙향하여 공부를 했지만 저는 시위대와 함께 다녔습니다. 그러나, 당시 민주시민들의 절규는 진압되었고, 무참한 죽음으로 끝난 듯 보였습니다. 그때 저는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즉 절망에 빠져 유서를 썼습니다.(거기서 안죽고 살아난 에피소트가 있지만 생략합니다.)

 

그 후 저는 명문대 대신(좋은 조건으로 갈 점수가 안됨) 학비가 거의 없는 서울교대를 갔고, 거기서 한국 교육과, 사회, 문화, 교육대학의 전면적 개혁론, 인간의 진화와 현대 인간론 등의 논문을 쓰고, 학원민주화에 참여하여 무기정학도 받았습니다. 1986년 간신히 교사가 된지 10개월만에 교육민주화 활동으로 해직 당하고 87년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후, 88년 복직했습니다. 전교조가 등장할 때 해직 대신 정직을 맞고 현장에 남아 지금껏, 나름 제가 근무하는 학교와 나라의 참교육-민족 민주 인간화(전교조의 3대 정신중 인간화는 제가 당시 회의에서 강력히 주장하여 결정되었습니다.)를 위해 줄기장창 노력하고 싸워왔습니다.

 

한편, 역사성과 영원성이 본질이신 하느님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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